다가오는 시들

술 시

나무숲산 2015. 10. 23. 12:29

꽃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나네

 

언제면 꽃아래 벗데리고 완월강취 하려노

 

* 이정보[16931766]

 

 

질방석 내지마라 낙옆엔들 못 앉으랴

 

손불 켜지마라 이제 진달 돌아온다

 

아이야 박주산행 망정 없다말고 내어라

 

* 한석봉[15431605]

 

 

술이 몇가지요 청주와 탁주로다

 

다 먹고 취할망정 청탁이 관계하랴

 

달 밝고 풍청한 밤이어니 아니깬들 어떠리

 

* 신흠[15661628]

 

 

자네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소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하옵네

 

백년 덧시름 잊을일 의논코자 하노라

 

* 김육[15801658]

 

 

한잔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 정 철 >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할 이 뉘 있으며

의원이 병 고치면 북망산이 저러 하랴

아해야 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 김창업 >

 

꽃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네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완월장취 하려뇨

< 이정보>

 

 

 

술타령/신천희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 봐라

내가 옷사입나

술사먹지

 

술통/신천희

 

내가 죽으면 술통밑에 묻어줘

운이 좋으면 밑둥이 샐지도 몰라

한잔의 포도주/ 박봉우

 

한 잔의 포도주는

바이블보다 귀중하다

공감하는 도시여

사랑하는 사람이여

닫혀진 철창문

부딘 벽을 헐고

단둘이만이

 

은하수와 같은

 

잔을 들고 싶구나

 

오랫동안 술을 하지 않으니

 

부질없는 벗들은

 

나의 곁에서

 

낙엽, 가을 낙엽처럼

 

떨어져 나가는구나.

 

벗들이여 사랑하는 이여

 

이제 귀로에 돌아와

 

너와

 

나와

 

그 옛날의 잔을 들자

 

한 잔의 포도주를

 

 

 

 

술한잔/정호승

 

 

인생은 나에게

술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

 

+ 선생님과 막걸리

 

해가 중천에 있고 겨울은 시작되었다

네모난 창에 등을 대고 언덕 내리막길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앙상한 미루나무 아래로 걸어 올라오시는 선생님

필경 우리 담임 선생님이셨다

울타리도 죄다 없어진 우리 집을 묻지도 않고 찾아오신 그 날

엄마는 신작로 중앙상회까지 내려가 오징어를 사왔다

콩콩 곤두박질 치는 심장은 곤로 속 심지보다 더 뜨거웠다

양조장집에 가서 막걸리를 두 됫박 넘게 받아오고

선생님은 오징어회를 맵지도 않은지 잘도 드셨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는 거지

나는 선생님이 떠난 후의 각오를 새롭게 했다

또 양은 주전자를 가지고 막걸리를 받아왔다

바닥에 쏟고 몇 번은 입을 대고 빨아먹었다

선생님은 두 번째 주전자마저 다 비우고서야 일어나셨다

무슨 말이 오갔을까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어디로든 도망쳐야 하는데

그날 밤 엄마는 아무말 없었다

그리고 한달 뒤 중학교 입학원서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날 느이 담임이 와서 가지도 않고 막걸리만 마셨는데

막걸리 잔을 비울 때마다 너는 꼭 공부시켜야 한다고 하더라

지긋지긋한 술

느 아버지도 모자라 이젠 담임까지 와서 술타령이냐

 

나의은인 담임 선생님

아마 그때부터 술을 가까이 하신 것일까

슬픔의 강 너머로 나의 선생님이 손짓한다

(최나혜·시인)

 

+ 술과의 화해

 

나는 요즘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나는 한때

어떤 적의가 나를 키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크기 위해 부지런히

싸울 상대를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 그때는 애인조차 원수 삼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솔직히 말해서 먹고 살만해지니까

원수 삼던 세상의 졸렬한 인간들이 우스워지고

더러 측은해지기도 하면서

나는 화해했다

너그러이 용서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더 크고 싶었으므로

대신 술이라도 원수 삼기로 했었다

요컨대 애들은 싸워야 큰다니까

 

내가 이를 갈면서

원수의 술을 마시고 씹고 토해내는 동안

세상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었고

책들은 늘어나거나 불태워졌으며

머리는 텅 비고 시는 시시해지고

어느 볼장 다 본,

고요하고 섬세한 새벽

나는 결국 술과도 화해해야 했다

이제는 더 크고 싶지 않은 나를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나는 득도한 것일까

화해, 나는 용서의 다른 표현이라고 강변하지만

비겁한 타협이라고 굴복이라고

개량주의라고 몰아붙여도 할 수 없다

확실히 나는 극우도 극좌도 아닌 것이다

 

적이 없는 생애는 쓸쓸히 시들어간다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강연호·시인, 1962-)

 

 

+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은 +

 

나뭇잎 한 바구니나 화장품 같은 게 먹고 싶다

 

그리고...... 말들은 무엇 하려 했던가

유리창처럼 멈춰 서는 자책의 자객들......

한낮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누워 꽃나무들에게 사과한다

지난 저녁부터의 발소리와 입술을,

그 얕은 신분을

외로움에 성실하지 못했던,

미안해 그게 실은 내 본심인가봐

 

아무래도

책상 밑이나 신발장 속 같은

좀 더 깊은 데 들어가 자야겠다

그러한 동안 그대여 나를 버려다오 아무래도 그게

그나마 아름답겠으니

(김경미·시인, 1959-)

 

+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시인, 1952-)

 

+

 

어젯밤 이슥하도록

동무들과 진탕 퍼마신 술

 

앙금으로 남은 숙취로

온몸이 돌덩이 같다

 

조금만 절제하면 좋았을 것을....

늘 한발 뒤늦은 후회

 

술과 인연을 맺은 지도

삼십 년 세월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 녀석의 정체를 도통 모르겠다

 

한순간 참 얄밉다가도

노을이 지면 살짝 그리워지는

 

애증(愛憎)의 신비한 벗

술이여!

(정연복, 1957-)

 

 

 

 

비 오는 날 / 천상병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 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

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

가방 들고 지나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싱싱하게 보이고

나의 늙음은 그저 노인 같다

비오는 아침의 이 신선감을

나는 어이 표현하리오?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깨끗이 눈감으리오.

 

 

 

 

 

 

술이란 / 박봉우

 

 

슬이란 술이란

 

혼자서 같이 마시기전에

 

친구와 섭섭히 하자

 

모가지를 축이는

 

모가지를 축이는

 

고달픈 하루여

 

술자리여 술자리여

 

혼자서 같이 마시기 전에

 

모든 친구와 섭섭히 하자

 

...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권일송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떠오르는 천년의 햇빛

지는 노을의 징검다리 위에서

독한 어둠을 불 사르는

밋밋한 깃발이 있다

 

어슬어슬 저무는

12월의 편지와 함께

열 일곱 소녀의 더운 눈길 같은

방황하는 세월의 종이 울린다

 

아직도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채

허구한 날의 곤한 날개와 파도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불빛도 없이 치닫는 열차 안에서

파아랗게 파아랗게 야윈 넋이여

토요일의 밤 별과 빛바랜

轉落의 창에 기대어

당신은 결코 죽음도 두려움도 모르는

어느 巨木의 슬픔으로 서 있을 것인가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눈을 열면 심상치 않은 유린의 바람

그것은 외진 벼랑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는 살의와 이방의 꽃

짐승들의 머리 푼 주검이

놀에 비낀 텅 빈 광야의 한 때

 

허물어진 금관의 둘레 만큼이나

아아라히 저무는 가장 인간적인 것

무더운 원색의 여름날

땀 흘린 도주의 난간 위엔

처형을 기다리는 문명한 달과

디모크래시의 피 벌은 함성이

묻어나 있다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스치는 바람결에 목을 늘여

만세록을 펼치고

서로의 더운 맨가슴을 마구

부비노라면

하나같이 열병을 앓는 사람들

포탄처럼 터지는 혁명의 夕刊 위엔

노상 술과 노래와 여자가 넘쳐난다

 

誤診된 세대와 짓밟힌 청춘을 위한

나는 애인과 집을 잃고

영영 돌아오지 않은 편지와 함께

장미의 5월을 울음 울고 나면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伐木 당한 수풀에 누운 달빛

古阜에 울린 동학의 말발굽 소리

뗏목으로 흐르는 어느 해

한여름의 통곡을 귀에 걸고

한 마당 징소리를 울릴 양이면

 

無頭鬼의 무덤에

비 내린다

비 내린다

 

지금은 병든 動詞港口

미친 듯 술레 잡는 목마의 꿈을 베고

기약도 없이 저무는

나의 호적과 詩集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천년 바람 미친듯 휘몰아 치고

어깨에 쌓이는 아픈 세월의 껍질

지나쳐 가는 온갖 사랑의 되풀이

화살처럼 허공을 꿰뚫는

이카루스의 황금빛 날개여

 

도는구나 세상이여

다섯 마당 여섯 마당... 열 마당째

돌고 도는구나 이승의 인연들이여

끝끝내 나의 사랑 先史의 하늘

타는 불씨를 땅 속 깊이 묻을 양이면

비에 젖는 공화국 헌법 제1

 

이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권일송- 1933 전북 순창 출생, 1957 년 한국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한국문협 시 분과 회장 역임, 1996 년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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