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향교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조선시대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유학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서 하옥리 백학동(白鶴洞)에 창건되었다.
1684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967년에 명륜당과 부속건물을 보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내삼문·외삼문·동재·서재·교직실·제기고·창고 등이 있다. 대성전 안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건축형태이며, 대성전은 정면3칸, 측면 3칸이고,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홀처마 팔작지붕이고, 동재·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우진각 지붕이다. 동재·서재 옆에는 동재각과 서재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소장 전적은 판본 45종 171책과 사본 13종 17책이 있으며, 이 가운데 『계약장정(契約章程)』·『완의(完議)』·『유안(儒案)』·『유계좌목(儒稧座目)』·『청금록(靑衿錄)』·『향안(鄕案)』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 금산향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산의 칠백의총
사적 제105호. 1592년(선조 25) 8월 1일조헌(趙憲)의 의병과 영규(靈圭)의 승병이 합군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이어 8월 18일 남은 700인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막강한 왜군과 혈전을 벌여 전원이 순절하였다.
4일 후인 22일 조헌의 제자 박정량(朴廷亮)ㆍ전승업(全承業) 등이 시체를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1603년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峯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지고, 1634년(인조 12) 순의단(殉義壇)이 설치되어 제향을 올렸다. 그 뒤 1647년 종용사(從容祠)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1663년(현종 4)에 ‘종용사’라는 사액(賜額)과 4결(結)의 토지를 내려 춘추제향에 쓰게 하였다.
순의단이 설치되면서부터 각 지방수령과 유생의 성금과 의연금이 답지하여 옆에 강당인 종용당(從容堂)도 건립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는 일본인들이 진화사(進化社)를 만들어 사우(祠宇)와 의총을 허물고 일군순의비를 폭파한 뒤 제토(祭土)를 강제로 팔아버렸다.
광복 후 1952년에 군민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재건하였다. 1970년 국가에서는 경역을 2만2800평으로 확장하고 종용사ㆍ기념관ㆍ순의탑 등을 새롭게 지어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남원의 만인의총,
남원에는 만인의총이 있습니다. 만인의총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한 곳에 묻은 합동 묘입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이치에서 권율에게 패하고, 남해안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하여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차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먼저 점령한 뒤 북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고, 일본군은 약 5만 6천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남원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습니다. 전라북도의 남원은 지리적으로 전라도, 충청도를 연결하는 곳이며,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 안에서는 주민, 관리, 군인이 하나가 되어 굳게 뭉쳐 성을 방어하였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대군의 공격에 남원성은 결국 함락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전쟁 이후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시신을 거두어 한 곳에 묻어 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만인의 총입니다.총
전라북도 남원에는 만인의총이 있습니다. 만인의총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한 곳에 묻은 합동 묘입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이치에서 권율에게 패하고, 남해안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하여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차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먼저 점령한 뒤 북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고, 일본군은 약 5만 6천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남원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습니다. 전라북도의 남원은 지리적으로 전라도, 충청도를 연결하는 곳이며,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 안에서는 주민, 관리, 군인이 하나가 되어 굳게 뭉쳐 성을 방어하였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대군의 공격에 남원성은 결국 함락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전쟁 이후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시신을 거두어 한 곳에 묻어 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만인의 총입니다.
일본 교토의 귀무덤(코무덤)
귀무덤(일본어: 耳塚 미미즈카[*]).은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무덤으로,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받드는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건너편 공원에 방치돼 있다.사람의 “귀”를 묻은 무덤을 뜻하나, 그곳에 묻힌 것은 "귀" 뿐만이 아닌 코를 있다하기 위해 목 대신 베어갔던 코를 묻은 무덤이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 무장들이 부피가 큰 목 대신 가져갔던 것으로 본래 이름은 코무덤(鼻塚)이었으나 이름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으로 바뀌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에게 조선 백성들을 보는대로 사살해서 그 수급(首級)을 모아오라고 명령했는데 수급이 너무 무거워서 그 대신 귀와 코를 모으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군은 조선에서 조선군과 민중들을 죽이고 코를 베어갔다. 일본군 장수들은 코를 베어 일본에 보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코영수증을 써주고 소금에 절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일이 그 숫자를 센 뒤 장수들에게 감사장을 써 보냈다. 그런다음 일본 온나라를 자랑스레 순회한 뒤 교토에 묻었는데 지금도 일본 쿄토에 가면 이 때 베어간 코무덤이 있다.
처음에는 코무덤으로 불리었으나, 에도시대 초기 유학자 하야시라산(林羅山)이 '코무덤'은 너무 야만스럽다며 '귀무덤'이라고 쓴 이후로 지금까지 귀무덤으로 알려진것으로 보인다. 현재 교토시가 세운 코무덤 설명 팻말에는 '귀무덤'이라 쓰고 괄호 안에 '코무덤'을 덧붙여 놓았다.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코무덤'이 너무 야만스럽다며 '귀무덤'으로 바꿔 불러 지금까지 귀무덤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코무덤'이다. 이 코무덤에는 조선인 12만 6000명 분의 코가 묻혀 있다.
일부는 사천시로 옮겨갔으나 완전한 이장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도 별도의 관리 예산이 지원되지 않고, 한국에서도 전혀 별도의 예산 지원이 되지 않아서 3대째 이 무덤을 관리하는 개인이 유지하고 있다.금산 용강서원금산 용강서원(錦山 龍江書院)은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에 있는 서원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용강서원
용강서원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42년(1716)에 세워졌으며, 우암 송시열(宋時烈), 동춘 송준길(宋浚吉), 시남 유계(兪棨), 미호 김원행(金元行), 역천 송명흠(宋明欽)의 강학활동이 이어졌던 금산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에 폐쇄되었다가, 유림이 헐린 재목을 모아 강당을 복원하였다.
건물로는 5칸 규모의 강당이 있는데,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은 좁은 공간으로 꾸몄다. 조선시대에 서원의 확장을 막는다는 구실로 폐쇄되었지만, 광복 후 지방 유림의 정성으로 다시 복원하어 금산지방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원이다.금산 청풍서원1678년(숙종 4)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길재(吉再)의 청절(淸節)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76년과 1979년에 군의 지원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강당,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 비각(碑閣),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등이 있다.
사우에는 길재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9월 1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6변(籩)6두(豆)이다. 재산으로는 밭 2,500여 평과 논 1,500여 평 등이 있다.
무주향교
398년(태조 7)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처음은 현의 동쪽에 건립하였다가 그 뒤 북쪽으로 옮겼는데, 이건한 뒤 호랑이의 침해가 심하여 1692년(숙종 18) 부사 김몽상(金夢上)이 향로산(香爐山) 서쪽으로 다시 옮겼으나 지대가 습하여 1834년(순조 34) 이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876년과 1884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고, 1897년(고종 34) 군수 조병유(趙秉瑜)가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1966년에 보수하였다. 1834년 김속(金涑)이 쓴 『향교이건기(鄕校移建記)』를 통해 무주의 열악한 상황을 알 수 있다. 무주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사대부가 부족하고 무주향교 건물도 방치되어 유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무주에 부임한 수령들에 의해 무주향교가 확장 또는 이건되거나 중수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 정면 5칸과 측면 2칸의 명륜당,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동재(東齋) 양사재(養士齋)와 서재(西齋) 전사재(典祀齋), 교직사(校直舍)·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현재도 지역 내 많은 학자들의 회합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일요 학교를 통해 교육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대성전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분양서원
달성 서씨 문중의 서당으로 쓰이던 풍성당(豊城堂)을 무풍면 지성리로 옮겨 수리한 뒤 1901년 분양정사(汾陽精舍)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5년 동쪽에 숭모사(崇慕祠)를 추가로 짓고 1973년에 분양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지내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亂) 때 유배된 조선 초기의 충신 남은(南隱) 서섭(徐涉)과 1585년(선조 18) 국자감시에 합격한 선조 때의 학자 취정(翠亭) 서효재(徐孝載)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경내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숭모사와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강당 외에 분양정사묘정비·내삼문·외삼문·고직사(守直舍) 등이 있다. 보호구역의 면적은 6,899㎡이며, 달성서씨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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